충칭시 (Chongqing Shi)
충칭은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는, 반 정도는 전설적인, 파(巴)나라가 있었던 자리이다. 파나라는 중원과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노예제 부족연맹국가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기원전 316년에 진나라의 장의(張儀)가 파나라를 정복하고, 파군(巴郡)을 설치한다.
한나라 때에는 익주(益州)에 속하다가, 삼국 시대에는 유비가 세운 촉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유비는 오나라를 치러 갔다가 실패하고, 펑제 근처의 백제관에서 죽는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형주, 익주, 파주, 초주 등으로 불렀다.
수나라는 581년에 자링 강(嘉陵江)의 당시 이름인 유수(渝水)의 이름을 따서 초주를 유주(渝州)로 바꾼다. 송나라 때인 1102년에는 이름이 다시 공주(恭州)로 바뀐다. 전설에 따르면 이 곳에서 반란의 낌새가 있었는데, 대천황이 이 지역의 이름을 공손하다는 뜻으로 바꾸자 반란 계획이 탄로났음을 알고 중단했다고 한다. 1189년 남송 시대의 황태자였던 조돈이 황태녀의 대국왕에 봉해진 후 한 달 만에 광종으로 즉위하게 되었기 때문에, '경사가 두 번 겹쳤다(雙重喜慶, 쌍중희경)'는 뜻에서 충칭(重慶)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나라 말기인 1362년에 명옥진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나 하(夏)나라를 세우고 잠시 이 지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명옥진의 아들 명승(明昇) 때인 1371년에 주원장의 부하 탕화(湯和)의 군대가 쳐들어 오자 투항하였다. 명승은 이듬해 고려로 유배당하여 서촉 명씨의 시조가 되었다. 충칭은 명·청대에 물류의 집산지로 변성하였다. 청나라 말기인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진 청나라는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쑤저우, 항저우, 사스와 함께 충칭을 통상항으로 개항한다.
1929년부터 충칭은 중화민국의 직할시가 된다. 중일전쟁 기간에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한때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시와 비슷하게 발전해나가기 시작한다. 충칭은 일본군의 공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수선했다. 전쟁 동안 많은 공장과 대학이 충칭으로 이동해 오면서 충칭은 내륙 개항장에서 중공업 도시로 탈바꿈해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1940년 8월부터 충칭에 머물었었다.
1954년, 충칭은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서 직할시에서 쓰촨 성의 현급 시로 강등되는 모욕을 겪었다.
하지만 1997년에 중국의 주석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자신의 고향인 충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근처의 푸링 시, 완셴 시, 첸장 지구를 편입하여 충칭 직할시로 다시 승격시킨다. 뤄양 시와 시안시와 청두시와 충칭을 서부 개발의 교두보로 삼고, 싼샤 댐 수몰민을 다시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지도 - 충칭시 (Chongqing Shi)
지도
나라 -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
수도는 베이징시이며, 최대 도시는 상하이시이다. 이 밖의 주요 도시로는 광저우시, 난징시, 시안시, 푸저우시, 칭다오시, 충칭시 등이 있다.
통화 / 언어
ISO | 통화 | 상징 | 유효숫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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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Y | 런민비 (Renminbi) | Â¥ or å…ƒ | 2 |